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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7-10-01 17:13 수정일: 17-10-0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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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수도 있지 (2017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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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은진목사
 조회 : 7,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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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보았던 어느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이 기억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부부가 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항상 늦게 일어나는 게으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제작진이 아버님은 몇 시에 일어나시냐고 질문을 하자 ‘영감은 너무 일찍 일어나 설치는 바람에 모두들 잠을 깨워’하고 불만을 쏟아 놓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픽 웃음이 났습니다. 늦게 일어나고 일찍 일어나는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늦게 일어나면 게으른 것이고, 자기보다 일찍 일어나면 설쳐대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기준대로라면 아들 입장에서는 두 분이 다 일찍 일어나서 설치는 것이고,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두 명이 다 게으른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갈등은 자신이 기준이 되는데서 옵니다. 쟤는 왜 저래, 건방져, 기분나빠 등의 표현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내 모습도, 상대방에게는 건방지고 기분나쁘게 평가되고 있을 것입니다. 다 자기가 기준입니다.
모두들 살아 온 환경과 형성 된 가치관이 다릅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내 감정과 내 방식에 맞지 않는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관용과 용납이 필요합니다. 그럴수도 있지, 뭔가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면 격앙된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반복해서 이런 마음의 태도를 연습하면서 내 마음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숙한 인격이 쌓이게 됩니다.
잔뜩 웅크린 채 날 건드려만 보라고 터질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 사람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불평과 원망과 서운함 가운데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이래서 안되고 사회는 이래서 안되고 교회는 이래서 안되고 대통령은 이래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내 생각에 하나님은 이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못믿겠다는 것입니다.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방 안에 날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의 염색체 정보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이 모든 일의 기준이 되어 살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겸손과 상대방에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내가 느낀 대로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입력 된 정보 뒤편에 있는 내막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 섭섭병에 걸리기도 하고 잘라내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조금만 애를 더 써서 상대방에게 지금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고 믿어주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오해가 풀려가게 됩니다.
한 가지 오해는 또 다른 오해를 낳습니다. 나한테 섭섭한 감정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단정 해 버리면 이 후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 결정을 뒷받침하는 재료가 됩니다. ‘당신이 그렇게 나와? 좋아 나도 관심 꺼버리면 돼’하면서 골이 깊어갑니다.
설령 상대방의 부족함이나 배려없음으로 인해 감정이 상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럴수도 있지’하고 이해 해 주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편합니다. 섭섭한 감정의 노예로 붙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편견과 오해는 정죄와 무시 같은 원치 않는 행동을 낳게 만듭니다. 더욱이 우리는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자존심과 판단이 사명을 거스르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뭐 그럴수도 있지.
이 마음 하나면 내 마음의 억울함과 격정이 대부분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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